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문단 편집) ==== 새 황제와 원로원 ==== 병사들의 추대로 제위에 오른 직후, 반란군을 이끌고 황제 막사로 쳐들어갔다. 이때 그는 황제 막사에서 전쟁 전략 회의 중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모자를 비롯하여 황제의 개인고문, [[세베루스 왕조]]의 황제 고문, 장군, 원로원 의원들을 죄다 죽였다. 이후 그는 이 사실과 자신의 즉위를 원로원에 통보하며, 자신의 즉위를 추인할 것을 요청한다. 이는 새 황제의 출신, 성장 배경[* 로마 시민도 아닌 트라키아 야만족 출신에 부사관 + 즉위 자체도 찬탈형식.]이 아니꼬운 원로원을 자극하게 되는데, 이때까지 원로원은 막시미누스를 내켜하지 않았을 뿐 증오하지 않았다. 허나 막시미누스가 등극 이후에도 늘 원로원을 의심하고, 툭하면 꼬투리 잡아 자신들을 숙청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원로원은 그를 미워하고 증오했다. 이는 막시미누스도 마찬가지라서 양 측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원로원이 그를 미워하고 내켜하지 않은 이유는 많았다. 먼저 막시미누스 황제는 원로원 의원이라고 하면, 증오심을 표출하면서 그들이 음모를 꾸미고 늘 자신을 안 좋게 본다며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는 그가 로마는커녕, 이탈리아도 방문하지 않으면서 걸핏하면 원로원이 문제가 많다며 씹어대고, 그 수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을 악화시켰다. 따라서 재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원로원 대부분 인사들은 그를 교양 하나 없는 '''반 야만족'''이라고 깠고, 막시미누스의 발언들이 문제가 많다며 이를 지적하기도 했다. 이에 막시미누스는 증오심을 표출하며 이런 저런 이유로 꼬투리잡아 처벌하고, 이마저도 통보만 했다. 또 막시미누스는 진짜 교양 없고 무례했는데, 이는 고대 기록 중 원로원 입장이 아닌 기록들에서도 일관된 것을 볼 때 사실로 보인다. 물론 변방 야만족 출신인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로마군에는 역대로 낮은 신분에서 능력을 증명해 집정관까지 오른 인사가 공화정 이래 많았고, 제정 시대에도 폼페이아누스, 페르티낙스 등 지방도시, 변방 또는 하층민 출신 명장들과 밑바닥부터 출세해 제국의 요직을 차지한 이들이 수두룩했다.[* 가장 가까운 시기인 엘라가발루스 시대에 근위대장을 지냈던 사람으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즉위에 기여한, 발레리우스 코마존 역시 트라키아에 주둔한 일반 사병 출신의 하층민 태생이다. 코마존은 후계자 시절 콤모두스와 다른 지휘관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제국의 최상층부까지 승진했다.] 그런데 막시미누스는 여타 비슷한 환경에서 승진을 거듭한 군대 출신 인사들과 달리, 로마인들 기준에는 황제로 인정하기 힘든 위인이었다. 괜히 원로원이 아닌 일반민중들까지 이름 뒤에 '트라쿠스'[* 트라키아 놈이라는 뜻의 멸칭]을 붙여 비난한 게 아니다. 먼저 그는 다른 군인들과 다르게 그리스어는커녕 모국어인 라틴어도 교양있게 하지 못했다. 더 문제는 여타 일반 사병 출신들, 특히 백인대장 이상까지 승진한 이들과 달리, 그는 기본적인 로마법이나 관습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중요시 여기지 않았다. 이는 비슷한 환경에서 태어나 성공한 일반 사병 출신 장교들과 큰 차이가 있었다. 대개의 하층민 출신 사병들은 로마시민으로서 최소한 라틴어는 읽고 쓸 줄 알았고, 기회가 되면 최대한 교양도 갖추고 여러 관습을 숙지해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출세를 위해 기본적인 행정실무에 필요한 라틴어,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로마법도 숙지했고, 기혼자는 아내와 자녀들도 로마인의 관습을 익히도록 신경썼다. 이는 미혼자도 비슷해, 그들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늦깍이 결혼을 통해 기사계급 이상의 로마인 가정 출신의 가임기 여성과 결혼했다. 더군다나 막시미누스가 청장년기를 보낸 시기는, 아프리카 속주 중 동쪽인 트리폴리타니아 출신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집권 이후였다. 이는 곧, 황제의 권한이 중앙집권화되고 군대 출신들이 대거 관료층에 편입되면서 원로원 역시 어느 정도 이런 변화에 익숙해진 상황이었음을 말한다. 따라서 막시미누스가 보조병 출신으로 본인 대에야 로마시민권을 획득했다고 해도, 본인이 이런 부분에서 신경을 기울였다면 그 평가는 상당히 달라질 여지가 많았다. 물론 막시미누스 입장에서 보면, 로마시민 출신 군인들과의 이런 비교는 억울할 수도 있다. 황제의 총애로 진급한 야만족인 그를 황제가 제일 신경써서 그런 부분을 키워줘야 했을 시기의 황제가 하필이면 [[엘라가발루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비난은 어느 정도 막시미누스의 즉위 전 경력도 생각하고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의 재위기간은 14년도 아닌 고작 4년에 불과했고 막시미누스의 정확한 생년은 미상이나 기록등을 감안하면[* 세베루스 셉티미우스가 일개 군단장이었을 때 어린 나이에 경호원이 되었다는 기록 등.] 엘라가발루스가 성희롱 하였을 당시의 막시미누스는 적어도 40대 중후반은 되었다. 즉 당시의 막시미누스는 마냥 젊은 나이가 아니었고, 이는 엘라가발루스 이전에 (본인이 세베루스의 눈에 띄여 경호원이 된 이래로) 군경험과 승진을 하면서 충분히 제국 내에서 출세하는데 필요한 교양과 경험, 지식을 쌓을 시간은 충분하였다는 소리다. 게다가 엘라가발루스가 살해되고 알렉산데르 치세 때도 그러한 시간은 13년동안 있었다. 또한 [[베스파시아누스]] 같이 [[경력단절|커리어를 중간에 끊어먹어도]] 나중에 복귀하여 장군이나 황제가 된 자도 있다. 하지만 막시미누스는 겪은 문명인의 사회생활이란 거칠디 거친 로마군 부사관 경험이 전부였고, 기본적으로 그는 신병들과 부하들에게만 좋은 형일 뿐 다른 직군 종사자들과 인간관계를 깊게 맺지 않을 정도로 꽤 폐쇄적이었다. 이는 그의 아내도 비슷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막시미누스처럼 그의 아내 [[카이킬리아 파울리나]] 역시 남편이 즉위한 이후 로마와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없었고 교류도 없다시피한 사람이었다.[* 최근 발굴된 비문을 통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아내 카이킬리아 파울리나가 남편이 재위에 갓 오른 235년 혹은 그 다음해인 236년 사망한 것이 확인되고 있다. 더욱이 아내의 경우, 문제가 많은 남편과 달리 유순하고 온화했다는 말이 여럿 있어 그녀가 살아생전 로마와 이탈리아를 방문하지 않은 것은 막시미누스가 황제가 된 직후 사망한 것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자신의 누이와 막시미누스의 장남을 결혼시켜 사돈이 되려는 계획을 취소시킨 것도 막시미누스가 저속하고 천박한 행동을 해온 것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콤모두스 황제의 누이인 루킬라도 자신보다 출신이 낮다는 이유로 기사계급 출신 장군 폼페이아누스와의 혼사에 불만을 가졌는데, 황실의 사돈 될 인사의 행실이 그 모양이면 진행을 할수가 없는 게 당연하지만. 막시미누스가 청장년기를 보낸 2세기, 3세기 로마 제국은 공화정 후기, 서기 1세기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 그리고 트라야누스 시대와 달리 여러 부분에서 제국 관료 집단 구성 및 양성 방법이 변화하고, 그 과정에서 원로원 구도 역시 속주[* 특히 지중해 동부와 북아프리카, 도나우강 유역] 출신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본래 로마 제국의 선출직 정무관과 관료제 아래의 중앙, 속주 관리들의 업무는 기본적으로 건국부터 군대 조직과 민간 조직이 하나로 결합되거나, 함께 처리해야 방식이었다. 따라서 로마 엘리트들은 원로원이나 관료가 되기 전, 군에 들어가 군역의무를 맡으면서 자연스레 군공을 쌓고 여러 행정실무 기술을 배웠다. 이는 황족, 세습 원로원 귀족청년들도 당연히 거쳐야 될 일종의 엘리트 교육 중 필수 교육이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 장남 티베리우스와 나눈 서신에서도 직접 언급된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양손자, 종손이며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훗날의 [[클라우디우스 1세]])의 미래를 걱정하다가,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 티베리우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소이다. 나 역시 티베리우스처럼 이 아이가 형들과 마찬가지로, 기회를 얻어 정치를 하고 군인이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소이다"며 고백하며, 로마인에게 군대경험과 군복무가 국가행정 실무와 제국 통치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언급했다.] 하여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친혈육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성년식을 마친 직후부터 속주 혹은 로마나 이탈리아에 남아서라도 반드시 군업무 보조라도 체험케 하도록 하고, 이 과정에서 병사들 속에 섞여 행정실무를 배우게 했다. 이는 중세 유럽과 동양 봉건왕조 황태자, 왕세자 제왕교육 방식과 유사하게 후계교육을 시작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예외들도 간혹 있긴 했지만, 콤모두스 역시 카이사르 자리를 공인받은 이후 꾸준히 게르마니아, 판노니아에서 직접 군사교육을 받고 그 과정에서 행정실무를 배웠다. 하여 로마 제국에서 말하는 사회지도계급은 곧 '군대를 정상적으로 다녀온 사람'이었고, 제정 시대 중기 이후에도 제국 안에서 정규집정관, 보결집정관이라도 해먹으려고 하면 군대를 다녀오거나 아예 웅변술, 수사학, 법학 등에서 군계일학이거나, 혹은 가문이 끗발을 날려야 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 시대때부터,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이런 것을 과감히 축소하고 사실상 폐기했다. 왜냐하면 이런 전통적인 방법으로 문무를 겸비한 엘리트를 양성하는 것으론, 갈수록 방대해지고 전문화되는 로마 제국의 정무직, 관리 부족 문제를 해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재풀은 한계가 있고, 어느 자리에 박아놓아도 제 몫을 하는 사람은 필요한데 세습귀족 중 수대째 권세를 누린 이들은 대가 끊기거나, 남아있는 이들은 고생하지 않고도 어떻게든 의석을 이을 수 있었으니 황제 입장에선 이런 조치라도 취했던 것이다. 하여 하드리아누스의 조치를 원상복귀시킨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역시 이런 이유로 타협적으로 과거처럼 무조건 군복무를 해야 의석을 준다는 식으로 되돌리진 않는다. 이는 막시미누스가 보조병에서 로마시민권을 얻고 황제 눈에 띠어 두각을 나타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어쩌면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막시미누스는 그 혜택을 누릴 절호의 기회를 잡았던 병사 중 한명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세베루스 황제는 내전 당시, 하드리아누스 이래 이 혜택을 받으면서 원로원 의석을 차지하고 이탈리아에서 부와 권력을 누린 푸닉, 그리스, 시리아, 아나톨리아 출신 원로원과 완전히 척을 지면서 발상의 전환을 했기 때문이다. 세베루스 황제는 이탈리아와 로마 부동산을 사들이고 스스로 이탈리아 귀족으로 자처한 지중해 동부, 푸닉 출신 인사들과 내전을 치루는 과정에서 원수 사이가 됐고,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제거 후 제대로 보복조치를 하면서 그들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하여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과거 황제들처럼 원로원과 관계 개선에 집중하는 노력을 함에도, 인재 등용 노선을 바꾼다. 이때 세베루스의 조치는 두 가지로 진행됐다. 첫 번째 조치는 원로원 신분과 이탈리아인의 특권적 지위를 동일시하지 않고 분리한 일이었다. 이는 푸닉, 동부 출신 원로원 권세가들이 이탈리아인을 대표한다는 전제 자체를 황제가 부정해버림과 동시에, 황제가 앞으로 로마와 이탈리아 일대를 다른 속주와 동일하게 다루겠다는 선전포고였다. 또한 황제가 권세를 누린 주류 세력[* 지중해 동부, 푸닉 출신의 이탈리아 거주 인사들] 중 찬성파만 기용해주는 것엔 한계가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래서 세베루스 황제는 어차피 소수로 축소된데다 2세기 이래 주류로 올라와 있던 푸닉, 동부 지중해 출신 인사들과 경쟁관계인 본국 이탈리아 혈통 귀족들 편을 들어주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멸문 후 백년 가까이 소외된 갈리아, 히스파니아 출신들을 황제가 밀어준다. 허나 사실 이 조치는 오래된 이탈리아 출신 귀족 및 서방의 갈리아, 히스파니아 인사들의 숫자가 통계상 40% 정도라고 해도 실상은 그 반절도 못된 현실 때문에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는 해결책이었다. 더욱이 황제와 세베루스 왕조는 공교롭게도 2세기 이래 주류가 되고 있는 지중해 동부와 푸닉 일대가 본적이었고, 처가는 아예 시리아인 까닭에, 2세기 주류 집단과 척을 지려고 해도 완전히 결별하긴 어려웠다. 더욱이 세베루스 황제가 원로원 숫자를 늘리고 매년 반대파를 쳐내고 과거 원로원 의석을 잃었던 오래된 로마, 이탈리아 귀족 가문 후예들과 자신의 친인척, 군 출신 인사들을 집어 넣어도 제국의 권력과 부를 차지한 주류 세력을 완전히 없앨 순 없었다. 즉, 황제가 원로원 900명을 다 물갈이하지 않는다면 이런 방법으론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그래서 세베루스는 이 방법을 쓰면서도 한계에 부딪쳤다. 이에 그는 발상의 전환을 해버린다. 그 조치가 바로 두 번째 방법인데, 황제는 자신이 원로원의 권위를 얻었음에도 제국 각지의 군대와 이탈리아의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충성과 지지를 받은 것을 공식화한다. 이는 뛰어난 법률가이자 원로원 의원 출신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법에서 보장한 원로원과 로마인민 모두의 지지를 확고히 한다는 선언이며 갈수록 제국 방어와 행정 전반에서 역할이 커지는 군대를 존중하겠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그 핵심 역시 인재풀 해결을 위해 과거 전통적인 방법으로 군행정을 익히고 있던, 또 고도의 훈련을 받고 있는 직업군인 출신 장교들과 하층민 출신 간부들을 끌어쓴다는 새로운 인재 등용이 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세베루스 왕조 이래 로마 원로원에는 전통적으로 군사행정 경험은 많지만 재력과 학력이 높은 기사계급에 밀려 진급이 막혀있던 평민 출신 대대장과 군단 수석 백인대장들이 황제의 추천을 통해 원로원에 다이렉트로 입성한다.[* 전통적으로 대대장 진급자들은 기사계급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나마 강력한 재력으로 귀족계급에 준하는 교양을 갖출 수있었기 때문이며 상당한 숫자가 군단장 진급을 하거나 원로원에 들어가기도 했다. 귀족이야 군생활을 처음부터 대대장으로 시작하지만. 저소득층 평민 출신은 대부분 병으로 전역했으며 실력으로 군단 수석 백인대장까지만 진급해도 대단한 명예였고 자력으로 대대장 진급은 노리기 어려웠다.] 세베루스 황제와 당시 세베루스 왕조 집권세력 입장에서 보면,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 안에서의 관료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고 황제의 중앙명령을 하달할 관료들의 숫자도 부족한 상황에서, 시간은 없고 원로원이 온전히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이 편이 나았던 것이다. 실제 세베루스 황제의 조치는 어떻게 보면 하드리아누스가 해결하려다가 더 악화시킨 관료 인재 부족 및 원로원 무능화를 모두 잡는 해결책이었기에, 당연히 효과가 있었고 평도 좋았다.[* 물론, 비티니아의 헬레니즘 귀족 출신 원로원 의원 디오 카시우스는 이 조치가 시행되자 "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거지꼴이 되고, 관료와 원로원 의원이 된 병졸 출신들은 그리스어도 못하고 귀족의 예의범절도 몰라 천박함만 보여준다"며 이 조치를 씹어댔다. 일단 정신승리에 가까운 로마 제국 시대 그리스인들의 드높은 자부심을 감안하면 반쯤은 깎아들어야겠지만.] 더욱이 세베루스는 "사람은 머리와 상식으로 통치하는거다"는 명언을 날린 것처럼 배우는 데 많은 돈이 드는 그리스어니 웅변술이니 수사학이니 철학이나 같은 것은 몰라도 행정실무에 사용할 라틴어와 법률에만 통달하면 문제될 게 없다며 평민 수석 백인대장, 대대장 출신들도 원로원에 꾸준히 충원케 하고 이를 후계자들에게도 적극 실행에 옮기게 한 황제였다. 그런데 이 발상의 전환은 막시미누스 같은 로마군 병사들에게 곧 기회가 된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황제들 시절엔 기사계급도 안 되는 깜냥 취급받던 과거와 달리, 황제가 대놓고 밀어주는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 직업군인 출신 장교들과 병졸 출신의 정규군 베테랑들]은 기본적으로 입대 전부터 간단한 셈법과 모국어인 라틴어 읽고 쓰기를 기본 바탕에 깔고 있었던 행정가들이라서, "발탁=승진=성공"을 의미했다. 실제로 이는 그 효과가 상당했는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이래로 이렇게 기용된 하급 직업장교와 로마군 병사들은 그리스어 실력이 부족하거나 서툴 뿐, 이 자리를 당장 맡아도 될 인재풀로 무척 유용했다. 당장 속주 주둔병사 중 백인대장 이상급들은 군행정과 민정에 당장 투입할 법지식과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어, 무척 유용한 원로원 대체자원인 데다 의석까지 주면 군단장 지휘관으로 활용하기도 편했던 것이다. 따라서 세베루스 왕조 시절부터 이렇게 원로원 의석을 받고 원로원에 편입된 이들이 늘어가게 되는데, 그들은 대개 막시미누스가 근무한 도나우 강 이남을 지키는 달마티아와 판노니아 출신 혹은 근무 장병들이 많았다. 이는 보조병 출신들도 비슷하여, 그들 중 그 능력이 있거나 개선의 여지가 있으면 근위대 장교나 중하위 관료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헌데 막시미누스는 이런 시대적 변화에서 비슷한 출신들과 달리 관료도, 원로원 의석도, 근위대 입성의 기회도 얻지 못했다.''' 즉, 세베루스 왕조 이래의 로마 상황에서, 막시미누스는 로마군 내에서 최대 역량이 신병 대대장이 최대치였고 애당초 로마 지도층에게 '함량미달자'로 인식됐다고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이런 능력의 한계 못지 않게 막시미누스는 업무 스타일 역시 과거의 페르티낙스처럼 자신의 성공을 자랑스러워 한 까닭에 본인의 결정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고집이 강하고 겸손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본인의 결정이라면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을 정도로 꽉 막힌 면이 많았다. 이런 이유로 막시미누스는 제위에 오른 직후부터 무슨 일이든 휘하 병사들을 대하듯 처리했고, 정무 방면에서도 늘 강압적이고 직설적인 군대식으로 명령했다. 또 그 통보 방식 역시 과격한 논조의 문구가 사용된 데다 직설적이고 저속한 측면이 많았다. 가령 그는 원로원에게 승전보고서를 보낼 때, 상투적인 예의있는 문구는 죄다 빼먹고 "지나가는 곳마다 적들을 박살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모두 쳐부수고 약탈하고 승리를 차지했다", "어떤 로마인도 이루지 못한 승리를 내가 이뤘다" 등으로 적고 자랑만 했다. 따라서 원로원이나 어느 정도 교육 받은 이들은 물론, 일반 민중들도 막시미누스를 매우 저속한 사람으로 인식했다.[* 사실 꽉 막힌 면이 화근이 되어 살해당한 페르티낙스도 자기 능력으로 해방노예의 후손 출신을 극복하고 명예로운 경력를 충분히 밟았으며 황제가 되기 전까진 유능함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막시미누스와는 달리 페르티낙스는 원로원 또는 일반 로마시민의 경멸이나 증오는 받지 않았다. 비록 최후가 좋지 않앟어도, 이런 점 때문에 나중에 세베루스에 의해 정통성을 인정받고 페르티낙스 살해 세력들도 응징을 받았으며 추존 받았다. 따라서 불통 때문에 페르티낙스를 막시미누스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 수도 있다.] 더구나 더 큰 문제는 막시미누스가 자신의 미약한 출신과 조악한 언변에 대해 인지하고 큰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황제에 즉위하자마자 한 일이 공식기록에서 자기 부모의 이름을 지운 것이었다. 이에 대해 후기 로마 제국의 역사가 조나리스는 막시미누스 부모의 이름이 믹카, 아바바였다고 밝히고 있는데, 만일 이 이름이 맞다면 막시미누스가 이름을 듣는 순간 국경 밖 이민족스러운 부모의 이름을 수치스러워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런 방어기제의 과도한 발현이 결국 막시미누스의 치세를 어지럽히게 되었다. 심리적으로는 관우와 장비의 결점만 있는 꼴이 된 것이다.[* 장비는 자기보다 머리좋고 유식한 사대부들은 공경했지만 자기 휘하는 까라면 까라고 억눌렀고, 관우는 휘하 병졸에 대해서는 자애로웠으나 무력 없이 공부만 한 사대부들을 업신여겼다. 그나마 관우는 춘추좌씨전에라도 통달하고 나서 담백하게 사대부의 위선이나 무능을 혐오한 것이었지만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래서 막시미누스는 자신보다 출신도 훨씬 좋고 학식도 뛰어난 원로원이 정치적 조언을 올바르게 해주더라도,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적대적으로 대했다. 따라서 원로원에서 조세 부과, 전쟁 수행과 관련해 올바른 조언을 하더라도, 이는 곧 황제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돼 잔혹한 보복으로 이어졌다. 즉, 그는 정치적으로 세련된 처신은 할 줄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원로원이나 지식인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를 개선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매우 귀족적인 집단이라고 해도, 변방이나 하층민 출신들, 특히 실력으로 승부하는 군대의 특성을 인정할 줄 알던 원로원은 당연히 막시미누스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로원이 서기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이래, 과거 이상으로 귀족적인 집단이 됐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로마 원로원은 정치 엘리트가 곧 군사 엘리트인 집단이었다. 때문에 예전에 군단장과 군사령관을 역임한 전직 고위 장성들이 즐비하게 앉아있었고, 각 속주 총독 중에는 군인 출신인 막시미누스의 군사행동이 알렉산데르 정부보다 괜찮다고 생각한 군인 출신 원로원 인사들도 여럿 있었다. 더욱이 로마 원로원은 하드리아누스 시대 이래 군경험조차 없는 세습 의원들이 증가했다고 해도, 군 경력이 별로 필요 없는 명문 출신 원로원 의원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생전을 기준으로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 인사들로는 훗날 황제가 되는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발레리아누스]]가 있다. 이중 발레리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칭제 후 반란을 일으킬 당시, 그들이 서한으로 첫 접촉을 한 원로원 중진의원이었다.]은 거의 대부분 가문의 의석을 세습받기 전까지 최소 대대장으로 의무복무를 마친 자들이 많고 그들이 원로원의 뼈대를 구성 중이었다. 즉, 막시미누스가 적당히 처신만 잘했어도, 원로원이 그를 증오할 이유가 없었다. 이를 증명하듯, 원로원은 서기 235년 마지못해 막시미누스를 새 황제로 추인해주면서 새 황제의 요청을 모두 수용해주고, 그가 취한 새로운 국경수비 전략을 이해해줬다. 그래서 막시미누스의 아내 파울리나를 서기 236년 신격화해 디바 파울리나로 선포해줬고, 막시미누스의 외아들 베루스 막시미누스에게는 프린켑스 유벤투티스라는 칭호를 손수 내려주면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는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 위대한 게르마니아 정복자]라는 근사한 칭호도 부여했다. 그러나 막시미누스의 태도는 여전히 원로원에게 적대적이었고, 약간의 비판이나 의문제기는 도전으로 인식돼 잔혹한 보복과 협박으로 이어졌다. 허니 원로원으로선 제 아무리 보살처럼 참아보려고 해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 국어 구사능력조차 평균 이하에 가까운 교관 출신 야만족이 원로원에게까지 졸병과 같은 복종과 충성을 강요한다면? 또 조언을 했다는 이유로 쌍욕과 비속어를 섞어 쓴 문장을 보내 죽일 놈 취급을 한다면? 당연한 말인데, 작문은 커녕 웅변도 세련되게 못하고 거친 말이 입에 밴 말년 상사 아저씨, 그것도 귀화한 말년 상사 출신이 단지 장병들 사이에서의 인기로 쿠데타에 성공해 대통령이 되었다고 설치고, 툭하면 자신들을 죽일 놈 취급하니 이 아저씨를 국가원수로 대우할 이유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